상단여백
HOME 라이프 관광/레저
바람 따라 유랑하는 노마드 키르키스스탄 · 카자흐스탄 · 우즈베키스탄

경험, 그리고 익숙함 

키르키스스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오토맥 패스를 넘어 카자흐스탄으로 간다. 앞서 지나온 토르갓 패스, 투아슈 패스보다는 낮지만 오토맥 패스도 해발 3천m를 훌쩍 넘는 험난한 길이다. 걱정을 많이 하면 의외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처럼, 오토맥 패스 정상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밟을 수 있었다.

휴식을 위해 잠시 정차한 오토맥 패스 정상에서 만년설을 만났다. 늘 멀게만 느껴지던 만년설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무척 신기했다. 호기심에 한 조각 떼어 내보려 했지만 눈보다는 얼음에 가까운 만년설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순간 더는 욕심 부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건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니까. 만년설 주위로 작고 노란 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는 사실도 그 때 알았다. 만년설만 바라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욕심을 내려놓으니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눈과 꽃. 낯설지만, 그래도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토맥 패스를 넘어 키르키스스탄 국경으로 가는 길에 거대한 저수지를 만났다. 카라보라라는 이름의 저수지다. 이곳은 레닌의 얼굴이 조각된 댐이 있는 저수지로 유명한데,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시내에 있던 레닌의 동상은 모두 철거했지만, 댐에 박혀 있는 레닌의 얼굴은 어쩔 수 없어 그리 남겨놓은 것이라 한다. 카라보라 저수지를 바라보며 고선지 장군을 떠올렸다. 

‘고선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서역을 평정했던 인물. 하지만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게 처절하게 패한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운의 장수.’

카라보라 저수지를 조성할 때 저수지 바닥에서 수많은 유골과 무기가 발견됐다고 한다. 일부 학자는 이를 두고 카라보라 저수지 일대가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상관없다. 1,300년 전, 고구려 유민 출신의 한 사내가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이곳 탈라스까지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곳에 서 있을 이유는 충분하니까.

카자흐스탄 국경을 막 통과했을 때다. 무전을 통해 1호차 계기판에 경고등이 들어왔다는 다급한 연락이 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차량정비를 담당하는 정민섭 대원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다행히 경고등은 타이어 공기압에 대한 것이었고, 구멍 난 타이어는 간단한 조치로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됐다. 두 번째 국경,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 세 번째 국경에서는 별일 없으려나. 다음 국경은 이틀 뒤 우즈베키스탄이다.

카자흐스탄은 우리가 지나는 8개국 중 가장 짧게 머물렀던 나라다. 공식 일정은 1박 2일이다. 하지만 두 번의 국경 통과가 일정 속에 포함돼 있어서 실제로 카자흐스탄에 머문 시간은 한나절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대부분의 시간은 이동하는 데 할애됐다. 카자흐스탄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건 전적으로 짧은 일정 때문이다. 그래도 뚜렷이 기억에 남는 두 단어는 있다. 소와 경찰. 카자흐스탄과 소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아스러울 테지만 개인적으로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많이 본 게 소였다. 키르키스스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넘어올 때도 그랬고, 카자흐스탄에서 우스베키스탄으로 넘어갈 때도 그랬다. 지나는 길목, 그곳이 시골길이든 고속도로든 시내만 조금 벗어나면 어디서나 소를 볼 수 있었다. 도로를 떡하니 가로막고 선 녀석도 있었고, 도로를 점령한 채 무리지어 이동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해질녘 멋진 실루엣을 만들어내던 녀석은 지금도 내 컴퓨터 속 바탕화면으로 남아 있다.

소에 대한 기억에 비해 경찰에 대한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카자흐스탄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검문을 받았다. 그 중, 잠불(Dzhambul)에서는 정말이지 최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검문을 경험해야 했다. 경찰이 차를 세우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차 유리에 부착한 썬팅 필름을 문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잠불에서도 그랬다. 사실 카자흐스탄뿐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차창에 썬팅 필름을 부착하는 게 불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국경을 넘으면서부터 줄곧 창문을 열고 주행을 했. 그런데도 전방과 후방 유리까지 문제 삼으며 차를 세우곤 했다. 차를 세운 경찰은 노골적으로 돈부터 요구했다. 오늘 중으로 국경을 넘어야 하는 우리의 처지를 알기라도 하는 듯 그들의 행동은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적법한 절차를 요구하는 우리에게 경찰은 이틀이나 걸리는 곳에 차를 두고 다시 오라는 말만 반복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보내줄 수 없다는 얘기와 다를 게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금액을 깎아주겠다며 흥정을 해오기까지 했다. 그곳을 벗어나는 방법은 너무나 명확했다. 한데 그 일이 있고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요구를 해오는 경찰을 또 한 번 만나야 했다. 이곳은 카자흐스탄의 잠불, 우즈베키스탄 국경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남성미 물씬 풍기던 키르키스스탄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다. 힘 있게 시선을 잡아끄는 건 아닌데 유려한 곡선과 부드러운 색감이 어우러진 풍경은 은근한 매력이 있다. 볼수록 보고 싶어지는 그런 매력이.

 

사람과 사람, 그리고 바자르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위치한 초르쉬 바자르는 중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 명성답게 입구부터 비집고 들어서기가 만만치 않다. 물건을 팔려는 상인과 물건을 사려는 손님으로 뒤엉킨 도로는 그야말로 사람이 산을 이루고, 사람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바자르 입구 도로에는 노점들이 진을 치고 있다. 대부분이 옷이나 생활 잡화를 파는 곳이다. 번듯한 진열대 하나 없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곳도 이들 노점 앞이다. 분홍빛이 고운 아이들 옷에서부터 제법 멋스러워 보이는 손지갑까지 있다. 물건을 사는 사람보다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고, 가지런히 개켜둔 옷을 이리저리 들추다 휑하니 가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인상 좋아 보이는 주인장은 뭐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다. 먹거리도 풍성하다. 매콤한 떡볶이와 뜨끈한 어묵국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쫄깃한 낭 한 조각에 과일주스 한 잔 곁들이면 그게 또 별미다. 그게 초르쉬 바자르의 풍경이다.

초르쉬 바자르에선 채소와 과일을 주로 판다. 복숭아, 포도, 사과, 바나나, 자두, 무화과, 감자, 고구마, 양파, 당근(노란색 당근도 있다) 등등. 사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과일과 채소의 이름이고 난생 처음 보는 과일과 채소도 많았다.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종류의 채소와 과일이 가득한 이곳을 지나며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참, 큼직한 낭을 정성스럽게 진열해 놓은 가게 앞을 지날 때는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동방의 푸른 진주

왕의 무덤을 뜻하는 ‘구르 아미르’는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인류 최후의 정복자, 티무르의 묘다. 티무르는 30년 동안 소아시아, 시리아, 북부 러시아, 인도 중심부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정벌하며 중앙아시아를 통일했다. 그렇게 탄생한 제국이 바로 최후의 유목 제국이라 불리는 티무르 제국이다. 티무르는 그의 아들, 손자와 한 자리에 묻혀 있다. 본래 구르 아미르는 티무르가 손자인 무하마드 술탄을 위해 조성한 곳이었지만, 명나라 원정에서 그가 병사한 뒤 왕가의 무덤이 되었다. 흥미로운 건 티무르의 스승도 이곳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티무르보다 높은 자리에. 무자비한 정복자이면서도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그의 성품이 반영된 것일까. 실제로 티무르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철저하리만큼 가혹한 방법으로 그 대가를 물었지만 그런 중에도 학자와 예술가만은 살려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가 아직까지도 ‘동방의 푸른 진주’, ‘동방의 로마’로 불리는 것은 그렇게 살아남은 예술가들의 손에서 빚어진 많은 유적들 때문일 것이다. 멋스러운 샹들리에와 화려한 문양으로 꾸며진 묘실 안에는 모두 9기의 묘비가 있다. 그중 정중앙에 자리한 흑갈색을 띤 것이 티무르의 관이 묻혀 있는 곳을 알려주는 묘비다. 석관처럼 생긴 묘비는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데, 중국산 연옥으로 제작된 티무르의 묘비는 주위의 다른 것과 비교해도 결코 크거나 화려하지 않다. 아니 되레 작은 편에 속한다. 그를 수식하는 화려한 문장에 비하면 소박한 느낌이 들 정도다. 티무르의 묘비에는 ‘내가 이 무덤에서 나올 때 가장 큰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하는데, 티무르의 관을 조사한 러시아 학자들에 의해 티무르가 절름발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3일 뒤 독일군의 러시아 침공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아니면 정말 티무르의 저주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후 티무르의 관을 용접해 다시는 관을 열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 레기스탄 광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거대한 돔의 푸른빛이 시선을 끌었다. 신비로움을 간직한 푸른빛. 순간, 사마르칸트를 ‘동방의 푸른 진주’라 부르는 건 아마도 하늘빛을 닮은 저 푸른색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레기스탄 광장은 왕의 즉위식과 국가 중요행사가 치러지던 곳으로, 중세에는 실크로드 최대 시장이 이곳에 서기도 했다고 한다. 푸른빛을 좋아했던 티무르는 자신이 건립한 많은 건축물을 푸른색으로 장식했다. 건물의 중심인 돔은 물론 벽체와 미나레트첨탑까지 푸른색 타일로 꾸몄다. 이는 그가 남긴 대부분의 건물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손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구르 아미르와 사랑하는 왕비 비비하눔을 위해 세운 비비하눔 모스크가 대표적이다. 티무르 양식으로 불리는 이 건축방식은 후대에도 이어져 레기스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레기스탄 광장을 구성하는 세 개의 건물은 ‘ㄷ’자 모양으로 자리해 있다. 티무르의 아들 울루벡이 세운 울루벡 마드라사와 우즈베키스탄의 200숨짜리 지폐에 그려져 있는 시르도르 마드라사가 마주보고 있고, ‘금박으로 된’이란 뜻을 지닌 티라카리 마드라사가 그 둘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세 개의 건물 중 ‘사자가 그려져 있다’는 뜻을 담고 있는 시르도르 마드라사는 이름처럼 파사드에 사자와 사슴, 그리고 태양의 모습을 그려넣은 것이 특이하다. 이는 티무르 왕조를 상징하는 꽃이나 코란의 글귀로 파사드를 장식한 다른 건물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당시로서도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다고 한다.

샤히진다는 티무르 제국이 번성했던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지어진 묘지유적이다. 티무르 왕의 부인을 포함한 많은 왕족과 종교지도자들이 샤히진다에 묻혀 있으며, 이슬람교도들에게 ‘살아있는 왕’으로 추앙받는 압바스의 묘도 이곳에 있다. 압바스는 마호메트의 사촌으로 이슬람교 전파를 위해 사마르칸트에 왔다가 도적의 칼에 목숨을 잃은 인물이다.

정철훈  @

<저작권자 © 전국아파트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철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