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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를 지나 유럽으로 1마샤드, 시라즈

니샤푸르Nishapur는 이란 동부에 위치한 도시다.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12세기까지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지만 이곳 역시 1220년 몽골군의 거센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니샤푸르는 혜초가 다녀간 서쪽의 끝이기도 하다.〈왕오천축국전〉에 기록되어 있는 ‘다시 파사국페르시아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대식국아랍에 이른다’는 내용이 그 근거다. 실제로 아자리 알리에빈이라는 사람이 쓴 책에는 ‘hwe-thsang’이라는 스님이 인도와 이란 동부를 여행하고 니샤푸르를 지나 당나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단, 혜초가 서역기행에 나섰던 시기와 100년 정도의 차이가 있어, ‘hwe-thsang’이 혜초 본인인지에 대한 연구는 더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휴식. 길. 안식. 카라반 사라이 가담거•니샤푸르•이맘 레자 성지

실크로드 상인들이 숙식을 해결했던 가담거는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는 몇 안 되는 카라반 사라이 중 하나다. 출입구를 지나면 수돗가가 있는 정원을 중심으로 숙소가 빙 둘러 있다. 숙소는 단칸짜리 방과 딱 그 방만 한 거실로 구성돼 있다. 방과 거실은 작은 문으로 연결돼 있는 반면 거실은 정면으로 열린 구조다. 방에는 실링팬이 달려 있고, 벽난로는 방과 거실에 하나씩 설치돼 있다. 말과 낙타 같은 동물과 짐을 보관하는 장소도 별도로 마련돼 있다. 이곳은 이슬람의 십이이맘파 제8대 이맘인 레자가 하룻밤 묵어간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맘 레자 성지는 십이이맘파의 제8대 이맘인 레자의 영묘가 있는 곳이다. 레자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죽은 뒤, 후계자를 두고 갈린 시아파와 수니파 중 시아파의 맥을 잇는 인물로, 35세에 이맘으로 지목됐다. 75만m²에 이르는 이맘 레자 성지 안에는 이맘 레자의 영묘를 포함해 나디르 샤 영묘, 의학자 샤이크 하킴 모멘 영묘, 그리고 3개의 박물관과 중앙도서관, 라자비 신학교 등이 자리해 있다. 그중에서도 이맘 레자 영묘의 크기와 화려함은 가히 압도적인데, 이는 이란 인구의 98%가 시아파라는 데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말 그대로 검은 옷의 물결이다. 이맘 레자 성지 앞 광장은 검은색 차도르로 온몸을 감싼 여인들로 가득했다. 그들 속에 화려한 색, 화려한 문양의 차도르로 한껏 멋을 낸 여인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딸처럼 보이는 아이도 밝은 색 스카프 위로 차도르를 걸쳤다. 이런 걸 모전여전이라 하는 걸까.

어둠이 내리면 이맘 레자 성지의 화려함은 절정을 이룬다. 수십 개에 달하는 파사드에 조명이 들어오고, 영묘의 둥근 지붕과 거대한 미나레트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든다. 종교를 떠나, 이맘 레자 성지의 야경을 바라보며 듣는 아잔의 은은한 울림은 참 편하게 다가온다. 새벽 안개 속에 들려오는 법고의 울림처럼, 해질녘 낮게 깔리는 첨탑 위 종소리처럼. 

서울 명동처럼 분주했던 이맘 레자 성지 광장 앞 도로에서 나는, 그냥 그렇게, 오가는 사람들 속에 묻혀 한참을 서 있었다.

“신기루다!”

어른거리는 지평선 위로 신기루가 나타났다. 사막 가운데 불쑥 솟은 붉은 산이 호수 위에 떠 있는 섬처럼 작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녀석이었다. 보는 방향에 따라 바다처럼 넓게 보였다가 호수처럼 좁아지던 녀석은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또 사라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붉은 산은 그때마다 섬이 되기도 하고 산이 되기도 했다. 

내가 신기루를 처음 본 건, 아주 어렸을 때였다.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 날, 우리 가족은 강원도 어딘가로 피서를 떠나는 길이었다. 차멀미가 심하다는 이유로 형과 동생을 제치고 운전석 옆자리를 차지한 나는 곧게 뻗은 도로 위에서 고인 물처럼 흔들리는 신기루를 처음 봤다. 저만치 보이던 신기루는 한순간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마술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어느 샌가 저만치 앞선 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고,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신기루 덕에 나는 그날 강원도 끝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해변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멀미에서 오는 욕지기를 느끼지 않았다. 

 

카라부란의 추억, 말카즈 사막

말카즈 사막은 타바스 사막이라고도 불린다. 말카즈 사막 가운데 위치한 작은 도시 타바스에서 따온 이름이다. 타바스는 1979년에 발생한 미 대사관 점령사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1980년 4월 대사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독수리 발톱 작전’을 승인했다. 타바스 사막에 침투한 특공대원들이 헬리콥터를 이용해 인질을 구해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8대의 헬기 중 2대가 고장을 일으켰고, 또 다른 1대는 거세게 몰아치는 모래폭풍에 수송기와 충돌해 추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말카즈 사막에는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박제된 채 남아 있다. 거세게 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맞으며.

이란 사람들은 호기심 많고 호의적이며 잘 웃었다. 이란 국경을 넘어 이곳 말카즈 사막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스쳐간 그들의 반응은 늘 한결 같았다. 눈 맞추고 웃고 손 흔들고. 고속도로에서 만난 이들 가족도 우리를 보고 한참동안이나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마도 터키 국경을 넘을 때까지 이런 기분 좋은 만남은 계속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이란의 모습은 뉴스 속에서만 존재했던 게 확실하다!

 

죽음, 그 뒤의 삶, 침묵의 탑•불의 사원•야즈드 구시가지

이란 고원에 자리한 야즈드Yazd는 조로아스터교의 발원지이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는 이란에서 조로아스터교가 발원했다는 건 좀 의외였지만, 이란에는 여전히 5만여 명의 조로아스터교 신자가 있고, 그중 1만5천여 명이 이곳 야즈드에서 생활하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 영혼은 영원하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불결하다고 여긴다. 해서 사람이 죽으면 흉물스럽게 변한 육신이 신성한 흙과 불을 더럽히지 않도록 매장과 화장 대신 조장(鳥葬)으로 장례를 치른다. 조장은 독수리 같은 새들에게 사체 처리를 맡기는 원시 장례법으로 발라진 뼈와 머리카락, 손톱 등은 6개월에 한 번씩 조장터 안 구덩이에 모아 염산으로 녹인다. ‘침묵의 탑’에서는 1920년대까지 조장이 이뤄졌다고 한다. 

언덕 위가 죽은 자의 공간이라면 언덕 아래는 산 자의 공간이다. 조장터는 죽어서만 들어올 수 있는, 죽은 자만의 공간이었으므로 유족들은 침묵의 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입구에서 시신을 관리자에게 넘긴 후 언덕 아래 유족을 위한 건물에서 15일 정도 머물다 돌아갔다고 한다. 유족들은 산 자의 공간에서 죽은 자의 공간을 올려다보며 죽은 자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불의 사원, 아테슈카데Ateshkadeh는 1천 5백년 동안 꺼지지 않고 있는 신성한 불이 있는 곳이다. 아랍세력의 위협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던 불씨는 아잘파란바흐 사원을 거쳐 193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사원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유리벽 너머 붉게 타오르는 그 신성한 불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애틋하던지, 유리벽에 비친 그들의 눈빛에 나까지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손에 들려 있던 그 불씨와 마주했을 때, 그 때의 눈빛이 저토록 애틋했을까.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그 작은 불씨를 받아들었을 때, 그때의 눈빛이 저토록 애틋했을까. 

대학시절 골목을 주제로 사진작업을 1년 정도 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뒷골목이었다. 골목이면 골목이지 왜 하필 뒷골목이냐고 묻는다면, 그 때는 지금과 달리 골목이 많았으니까, 어떻게든 다른 사진을 찍어보고 싶었으니까. 그런 내 의지의 강력한(?) 표현이 아마 ‘뒷’이라는 한 글자에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주위에서 골목은 흙길만큼 귀한 존재가 돼버렸다. 지금 골목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것들은 20년 전,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던 내 기준에서 본다면 대로에 가까운 길들이다. 그러니 그 때, 아이들이 모여 다방구를 하고 딱지치기를 하던 그 뒷골목들은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곳으로 변해버렸을 확률이 높다. 야즈드의 구시가지를 거닐다 뜬금없이 그 때 그 뒷골목들이 생각났다. 난생 처음 와 본 낯선 이국땅에서 왜 내가 살았던, 그러니까 서울 서쪽 변두리 동네의 좁은 뒷골목이 생각났던 걸까. 그건 아마 낮은 벽돌담, 낡은 철문, 그리고 순박한 얼굴의 사람들 때문이었을 게다. 내가 떠돌던 그 뒷골목에도 벽돌담과 낡은 철문과 순박한 얼굴의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앞으로 20년 쯤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또 어디에선가 야즈드의 구시가지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순간 나는 무척이나 반갑게 지금의 시간을 떠올리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처럼.

정철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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