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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빌바오市 네르비온강강에 문화 흐르자 도시가 살아났다

네르비온 강의 물줄기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가고 아름다운 구겐하임 미술관이 도시의 향기를 더하는 곳. 하지만 스페인 북부 중심도시 빌바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축구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스페인은 반한감정이 상당한 나라다. 다른 분야에선 그렇지 않은데 유독 축구와 제철`조선분야에서 심하다. 후자의 경우 10여 년 전부터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전자는 꼭 10년 전부터 시작됐다. 

스페인이 한국을 미워하는 것은 2002 한일월드컵 때 한국과 8강전에서의 패배를 심판 편파 판정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주최국인 한국이 심판을 매수해 스페인에게 노골적으로 불리한 판정을 내려 세계 최강국인 스페인이 실력이 형편없는 나라에 졌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도 스페인 축구 해설자들은 한국 축구를 언급할 때 ‘그 때 그 사건’을 반드시 상기시키며 ‘그런 한국 축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한번 보자’는 식의 야유성 코멘트를 내보낸다. 이런 연유로 스페인은 한국과의 친선경기에도 정예 멤버를 내보내곤 한다. 

축구에서 스페인의 반한 감정이 전국적인 현상이라면 산업 분야에서 반한감정은 바스크 자치정부 관할인 비스카이야주 주도인 빌바오에 국한돼 있다. 

 

중심산업도시가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

북부의 중심도시인 빌바오는 19세기부터 서쪽 인근 철광산이 발견되면서 산업과 물류가 발달했다. 1980년대초까지만 해도 제철, 철강, 조선공업이 흥성해 이 도시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런 도시가 어느 순간부터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원인은 바로 한국. 당시 박정희 대통령 주도로 중화학공업에 국가의 사활을 걸면서 우리나라는 포항의 제철, 울산과 거제의 조선업이 매년 괄목할만한 성장을 해나갔다. 

우리나라가 값싼 노동력에다 특유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수주량을 늘려나가자 반대로 빌바오의 중심산업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다. 21세기 들어 우리나라의 굴뚝산업이 중국의 저가 물량공세에 고전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 도시는 지금까지 굴뚝산업으로 인해 찌든 대기에다 각종 공해 잔해와 쓰레기들로 인해 회색빛으로 변했고, 가동을 멈춘 공장들은 폐허가 됐다. 산업 침체로 공장들이 잇달아 문을 닫으면서 빌바오는 실업률이 30%에 이르는 공황 시대에 접어들었다. 일자리를 잃은 시민들의 불안은 도시의 생명마저 위협했다. 여기다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테러를 감행, 빌바오는 점차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주민들은 이런 고통의 단초를 신흥철강국 대한민국이 제공했다고 보고, 반한 감정을 키워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빌바오 사람들은 한국인들을 만나면 스스럼 없이 “한국을 싫어했다”고 말한다. 

그 의미는 ‘전에는 싫어했는데 이제는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일하다. 좋아한다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싫어하는 감정은 없어진 것이다. 

이제 가난을 벗어났으니, 과거 영화를 누릴 때보다 더 주민 소득이 높아졌으니, 더 이상 대한민국을 미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빌바오시는 어떻게 쇠락의 길에서 탈출해 스페인에서 시세(市勢)가 상위권에 속하는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빌바오의 도시 살리기 프로젝트는 한국 제3의 도시 명성을 누리다가 광역시 중에서도 꼴찌 수준으로 전락한 대구나, 낙동강 살리기 프로젝트로 도약을 꿈꾸는 경북도내 시군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나라에 ‘한강의 기적’이 있었다면, 빌바오에는 ‘네르비온 강’의 기적이 있었다.

 

네르비온 강의 기적 

1970년대 45만 명이 살던 도시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진 탓에 인구가 20%가량 줄어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도시가 완전 괴멸되고 말 것이란 우려가 빌바오시 및 비스케이야 주정부는 물론 중앙정부까지 엄습했다. 

3자가 머리를 맞대고 도시를 살릴 궁리를 거듭한 끝에 얻은 해답은 고도화된 2차산업을 기반으로 하되 문화와 예술을 통한 도시 재생이었다. 

방향을 잡았으니 추진할 기구가 필요했다. 1992년 중앙정부와 주정부가 50%씩 출자해 독립성을 보장한 ‘빌바오 리아 2000’ 을 설립했다. 도시를 살리기 위한 경제활성화 프로젝트는 이곳이 중심이 돼 추진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네르비온 강을 정비해 시내에 있던 항구를 비스케이만으로 옮기고 ‘메트로폴리탄 빌바오’를 만들기 위해 신공항 및 신항만 건설, 전철망과 지상궤도열차 구축 등을 해나갔다. 

이렇게 해서 도시 재생에 총 비용 70억2천600만유로가 투입됐다. 이 중 네르비온 강 정화에 9억유로가 투자됐다. 지금도 투자는 진행 중이다. 강이 살아 있지 않으면 도시는 황폐화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덕분에 죽어있던 강에서 지금은 물고기가 산다. 하구에서도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낚시를 할 정도로 수질이 좋아졌다. 이 프로젝트가 시행되기 전에는 빌바오시의 하수구와 공장폐수가 모두 강에 직접 유입됐다. 그러다보니 코를 막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강을 살리는 작업과 동시에 공장들이 즐비했던 강가를 정비해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병행했다.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미술관과 음악당, 체육관을 건설한 것. 다음 회에 소개될 구겐하임 미술관 유치 및 운영 프로젝트는 빌바오 재생의 압권이었다. 

여기에다 기존에 경쟁력을 갖고 있던 2차산업을 고도화시켰다. 이런 노력이 바탕이 돼 지금도 빌바오산 철강은 세계 최고로 친다. 빌바오 한인회 김형구 회장은 최근 한국의 한 백화점이 국내 최고층 빌딩을 지으면서 엘리베이터에 쓸 철근을 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기술력에 비해 인건비 비중은 과거의 1/10로 줄였다. 생산 원가가 크게 내려갔다. 자연스럽게 도시의 경쟁력이 높아졌다. 고도화된 2차산업을 구매하기 위해 찾은 바이어들이 며칠씩 묵으면서 미술관을 구경하는 윈윈 전략이 먹혀들고 있는 것이다

 

도시 상징 된 구겐하임 미술관

6년간의 공사 끝에 1997년 개관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빌바오의 상징이다. 미국 건축가 프랑크 겔이 설계를 맡았는데 외관은 멀리서부터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외벽은 항공기 부품인 티타늄 3만3천 장으로 만들어졌다. 흐린 날에는 ‘은빛’, 맑은 날에는 ‘금빛’을 띤다. 미술관 전시장은 1만㎡에 이르며 19개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미술관 내부는 직선을 최대한 절제하고, 예측할 수 없는 곡선으로 디자인돼 ‘부드러운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전시실인 이른바 ‘스테이크 룸’도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국 철강계의 거물이자 자선사업가인 솔로몬 구겐하임이 수집한 현대미술품들을 기반으로 뉴욕에 설립됐다. 원래는 1937년 비대상 회화미술관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가 1959년 구겐하임미술관으로 개칭하였으며, 설립 초기부터 구겐하임재단이 운영한다. 구겐하임재단은 지금도 핀란드와 아랍권에 미술관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공장도 아닌 미술관?

번영을 누리던 도시가 목숨 줄을 놓을 지경이었는데 다시 살아났다. 살아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과거보다 더 큰 영화를 누리는 도시가 됐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어 전세계 도시들이 벤치마킹을 하러 온다. 그러다 보니 인구 40만 명인 이 도시는 늘 외국인들로 넘쳐 난다. 호텔은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을 잡을 수 없다. 

기자가 이 도시에 들른 5월 말도 그랬다. 호텔에 가니 예약이 잘못돼 방이 없었다. 수소문을 해서 방을 알아보는데 20분을 더 가면 대체로 방 여유가 있는 허름한 호텔 하나가 있단다. 어쩔 수 없이 스위트룸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빌바오가 기사회생한 가장 큰 요인은 강을 통한 문화와 예술의 접목. 그중에서도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한 것이 결정적 동기가 됐다. 

각종 공장 폐수와 생활 오수로 썩어가던 강을 살려내고 그 주변에 미술관과 음악당, 체육시설을 지었더니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1990년 도시를 살릴 방도를 고민하던 빌바오시청에 뉴욕의 구겐하임재단이 유럽 분관을 지을 계획이라는 정보가 날아들었다. 

당시만 해도 빌바오란 도시는 문화`예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도시였기에 미술관 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빌바오시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건축비용에다 부지 및 진입도로까지 완벽한 미술관을 제공하겠으니 구겐하임 측은 이름만 내걸어달라는 것. 

수차례의 만남을 통해 미술관 건립 의사가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한 구겐하임재단이 마침내 빌바오 입성을 결정했다. 

하지만 난관은 국내에 있었다. 시민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산업이 쇠퇴해서 먹고살기도 빠듯한 판에 무슨 미술관이냐는 비판이 봇물을 이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살 수 있는 길이 미술관 유치에 있다고 판단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밀어붙였다. 연일 반대 시위가 일어났지만 정부 당국의 의지는 확고했다. 이처럼 눈물겨운 행정당국의 노력과 추진력 뒤에는 성공을 확신하는 견고한 소신이 뒤를 받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5월 24일 빌바오시청에서 만난 이븐 아레소 기술담당 부시장은 “만약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절차를 거쳤다면 구겐하임 미술관은 유치하기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의 95%가량이 반대했다고 기억했다. 

어렵게 해서 미술관 문을 열었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빌바오 도심 문화예술 유지 기관인 ‘빌바오 인터내셔널’의 홍보담당자인 마리아 블란코(여) 씨는 “누구도 예상 못한 성과가 첫해에 발생했다”고 당시의 감격을 전했다. 심지어 미술관을 짓자고 주장했던 실무진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개관 첫해(1997년 11월~1998년 10월) 바스크지역 GDP가 1억4천400만유로나 증가했다. 투자비용을 상쇄하고도 1천100만유로가 남은 것. 개관 10년 만인 2007년 GDP는 2억4천300만유로가 증가했다. 개관 첫해 1년간 135만 명이 미술관을 찾았다. 이후 조금 줄기는 했지만 매년 95만~105만 명의 관람객이 찾아온다. 기자가 이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는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 

이 미술관이 인기를 끄는 것은 건물의 특징도 한몫을 한다. 아랍 사람들은 이 미술관을 ‘바라카(운이 좋은 건물)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중동의 돈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건축을 할 때 입지와 미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최정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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