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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경북 한옥 여행 <봉화 만산고택>

백두대간의 한 자락 망미산 줄기가 휘돌고, 운곡천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르는 춘양의 한 마을. 그곳에 만산고택이 있다. 솟을대문 당당한 이 집에 들어서면 준수한 외모의 사랑채가 넉넉한 품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그러나 외세의 침탈로 국운이 쇠퇴할 무렵 지어진 만산고택은 선조들의 간절했던 우국충정을 다 말하지 못한 채 집안 곳곳에 그 흔적만 남기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내려보낸 만산

만산고택은 고종 15년(1878년)에 지어졌다. 만산은 이 집을 지은 강용 선생의 호로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만산의 부친 백초 강하규 선생은 과거에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이조참의, 대사간 등 중앙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북청부사로 나갔을 때에는 가난한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어 깊은 존경을 받았다. 임기를 마쳤을 때 백성들이 유임운동을 벌일 정도였다고 한다.

강하규 선생은 특히 흥선 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아들인 만산 선생도 과거에 급제해 아버지와 더불어 부자가 모두 높은 벼슬을 지냈다. 이런 인연 탓에 흥선대원군은 만산고택이 지어졌을 때 친히 ‘만산(晩山)’이라는 현판을 하사하기도 했다.

만산고택에는 이 밖에도 당대를 풍미했던 명망가들의 현판이 21점이나 걸려 있었다. 대표적인 것은 서실에 붙은 현판 ‘한묵청연(翰墨淸緣)’이다. 영친왕이 8세 때 썼다고 전해지는 이 현판은 ‘글로써 맺은 맑은 인연’이라는 의미로 당시 만산의 집안과 조선 왕조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칠류헌의 현판은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의 글씨이기도 하다. 그러나 외세의 침탈로 국운이 쇠퇴하고 급기야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만산 선생은 모든 관직을 버렸다. 울분을 참지 못한 선생은 항소를 올린 후 모든 바깥일을 끊고 자연 속에 파묻혔다. 이 때 선생은 칠류헌(七柳軒)을 짓고 집 뒤 산림에는 망미대(望美臺)를 쌓아 망국의 신하된 설움을 달랬다. 특히 칠류헌이라는 이름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칠(七)’이란 월화수목금토일의 순환을 의미하는 숫자로, 천지운세가 순환하듯 조선왕조의 국운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만산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류(柳)’는 우국충정의 상징인 도연명이 자신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에 비유하며 ‘오류거사’라 칭한데 연유해, 여기에 둘을 더 해 ‘칠류’라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아름다운 고택이지만 그 속에는 나라를 빼앗긴 선비의 슬픔과 고통이 스며있었다.

안채의 전통 농기구들

어느 방이든 햇볕이 스며드는 따스한 고택

경상북도민속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된 만산고택은 정동향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구조를 띠고 있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너른 마당 앞에 팔작지붕의 사랑채가 위엄 있게 서있다. 이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글공부를 하는 서실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영빈관 격인 칠류헌이 있다. 그리고 사랑채 뒤편으로 ‘ㅁ’자형의 안채가 있다.

사랑채는 ‘ㅡ’자형의 개방적 형태를 띠고 있으며, 안채는 ‘ㅁ’자 구조로 폐쇄적 이다. 남성과 여성의 생활영역을 엄격히 구분했던 조선시대 상류층 주택의 분할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칠류헌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즉,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선비의 제일 큰 덕목으로 여겼던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다. 간단하게 손님을 맞이한 후 연회나 담론이 필요하면 영빈관인 칠류헌으로 모셨다.

만산고택은 130여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동학혁명, 일제강점기, 6.25동란 등 민족의 큰 사건을 겪었지만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만산의 5세손인 강백기 선생은 “선조들이 이웃들에게 후하게 대접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결과이리라.

만산고택은 정동향으로 배치된 덕분에 집안 곳곳에 햇볕이 잘 스며든다. 고택의 안주인 류옥영 여사는 “하루가 지나는 동안 어느 곳이든 한번쯤은 볕이 들어온다.”며 “대체로 한옥은 어두운 방이 많은데 우리 집은 그런 방이 없다.”고 소개한다.

 

아날로그 방식의 휴식이 있는 만산고택

강백기 선생은 만산고택의 화두는 ‘교류’라고 단언한다. 고택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여야 한다는 지론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가치가 없다. 그래서 2007년부터 방문객들에게 방을 내주고 있다. 개방을 하니 오히려 좀도둑도 없어졌다. 중요 유물은 국사편찬위원회나 한국국학진흥원, 대학 박물관 등에 맡겼다.

밤 12시까지 대문을 열어 놓으니 구경하고 싶거나, 자고 싶은 사람은 언제나 들어와서 청하면 된다. 만산고택에서는 휴식의 방법도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이다. 정부 기관에서는 명품고택이라는 명분 아래 에어컨, 옷장 등 각종 편의시설을 설치하도록 지원하고 있지만 강백기 선생 부부는 이를 거부한다. 워낙 산골이라 굳이 에어컨이 필요하지 않고, 모기도 별로 없어 방충망도 필요 없다. 방 예약은 전화로 하면 된다. 고택은 고택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편의시설이 필요 하다면 호텔로 가면 된다.

만산고택은 달빛 머금어 고요한 작은 방 뜨끈한 아랫목이 그립고, 그 안락함이 즐거운 사람들만 찾아오라고 권한다.

 

여행수첩

주소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288

전화 : 054-672-3206

류옥영 여사가 꽃 가꾸기를 좋아해 만산고택 곳곳에는 온통 야생화 천지다. 아늑한 고택에서의 하룻밤도 좋지만 이른 새벽 집안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대청마루가 많아 단체 모임 장소로도 좋다. 사랑채 앞마당에서 비정기적으로 음악회 등 문화행사도 개최된다.

총 12개의 방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사랑채, 안채 등의 작은 방은 4인을 기준으로 할 때 4만원~8만원이며, 서실은 7만원, 칠류헌은 15만원이다. 인원 초과 시 1인당 1만원 추가. 식사는 제공되지 않으며, 마당에서 취사는 가능하다. 그러나 절대 마루 위에서 취사행위는 할 수 없다. 고택 어느 곳이든 불을 피워서도 안 된다.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대부분 방은 심야전기로 온돌을 데우지만 서실과 행랑채 방 한 곳은 군불을 땐다. 겨울에 방문 시에는 사전에 난방을 해야 하므로 반드시 2~3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찾아가는길

중앙고속도로 풍기IC 진출 후 우회전하여 풍기 방면으로 1.1㎞ 주행, 봉현교차로에서 좌회전 후 영주시 방향으로 10.5㎞를 이동한다. 영주에서 봉화 방면으로 2.2㎞ 이동, 그 후 상망교차로에서 봉화(울진) 방면으로 28㎞를 이동한다. 춘양교차로에서 우측도로로 진출한 뒤 춘양삼거리에서 좌회전 후 2.2㎞를 이동 후 서동길에서 좌회전하여 약70m 이동하면 만산고택에 도착한다.

정철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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