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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경북 한옥 여행 <청송 서벽고택>

나라의 운명은 집안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나라가 망하면 나라와 함께 멸문지화를 당하기도 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기도 한다. 중뜰에 남아 있는 서벽고택은 본관도 바꾼 채 조선시대를 등지고 살았던 평산 신씨 판사공파의 후손이다. 200년이 넘은 고택과 고택에 깃든 은둔의 역사를 알아본다.

 

은둔의 길을 걷게 된 평산 신씨 영해 신씨가 되다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에 있는 서벽고택은 평산 신씨 판사공파 종택, 사남고택 등과 함께 평산 신씨 판사공파 집안의 집성촌이다. 평산 신씨는 장절공 신숭겸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거치며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하지만, 청송군 파천면에 세거하고 있는 평산 신씨는 조금 남다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평산 신씨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평산 신씨 판사공파는 이유헌 신득청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신득청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공민왕 때 왕사였던 신돈의 전횡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해(현재 영덕군 영해면)로 낙향한 뒤 조선이 개국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한 인물이다. 신득청은 역성혁명으로 세운 조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자손들에게는 특별한 유지를 남겼다. 본관을 영해 신씨로 바꾸고, 새시대가 도래하면 다시 평산 신씨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현 서벽고택의 주인인 신효승 선생도 젊었을 때 호적 등본을 떼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평산 신씨로 알고 있었는데, 호적에는 영해 신씨로 되어 있었으니 놀랄 수 밖에……. 1980년 대 들어 영해 신씨는 다시 평산 신씨로 회복되었다. 조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평산 신씨 판사공파의 은둔의 흔적은 마을 입구에도 온전히 드러난다. 용전천이 마을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가운데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천변을 따라 울창한 송림이 펼쳐져 있다. 이 송림은 평산 신씨가 세거하는 마을을 가리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은둔의 삶을 유지로 삼은 집안이었으니 충분히 그랬을 법 하다. 조선으로부터 중용되지도 않았지만, 혼탁한 출세의 길을 내던지고 선비의 길을 택한 집안의 당당함이 엿보인다. 현재는 송림의 대부분을 농지로 개간하면서 마을입구의 일부만 남아 있다. 개간하기 전에는 수백미터에 이르는 송림이었다고 하니 마을을 충분히 가리고도 남았으리라.

서벽고택의 대청마루에서 본 모습

서벽고택, 기증에 실패하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 서벽고택과 종택 주변으로 기와집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종택 앞에는 종택보다 더 크고 으리으리한 집이 들어섰을 정도였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고택을 나누던 흙담도 사라지고,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면서 폐가가 되거나 주택개량을 해 고즈넉한 기와집의 고풍스러움은 사라졌다.

서벽고택도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중평리를 폭격하려고 했었는데, 북한군이 새터(현 신기리)를 오폭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90년 대에는 서벽고택을 대구의 모 대학에 기증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기증 절차에 따라 고택의 상태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고택이 워낙 오래되고 낡아 기증 보다는 그대로 유지하는 편이 낫다는 조사결과가 나와 기증하지 못한 일도 있다. 기증하지 못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서벽고택은 1993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 101호로 지정되어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벽고택의 주인인 신효승 선생은 몇 해 전부터 고향에 내려와 고택을 지키고 있다. 고택은 1983년부터 20년이 훨씬 넘게 비어 있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서벽고택이 무너져가는 안타까움이 짙었던 모양이다. 자고로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 사람의 온기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이미 그 집은 집으로써 가치를 잃는다. 그리고, 추억도 사라진다. 아마도 신효승 선생이 서벽고택을 다시 찾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자 굴뚝으로 모락모락 연기가 난다. 나무타는 냄새가 참 좋다. 마치 고택이 되살아 나는 것처럼 온기가 피어오른다.

 

독특함이 묻어나는 서벽고택

서벽고택은 평산 신씨 판사공파가 중평리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입향조인 신한태가 평산 신씨 판사공파의 종택을 지었고, 그의 막내 아우인 신한창이 분가하면서 지은 것이 바로 서벽고택이다. 서벽고택은 조선 영조 때에 이르러 신한창의 증손인 신치구가 증축하게 되는데, 자신의 호를 붙여 서벽고택이라 불리고 있다.

서벽고택 안마당에서 고택을 바라보면 제법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좌우로 1칸씩 연장이 되어 있고, 전면에서 보이는 두 개의 합각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기 때문인데, 복원되기 전에는 합각이 그려내는 곡선이 훨씬 깊었다고 한다.

서벽고택은 전형적인 경북의 ‘ㅁ’자형 집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 상방과 고방이 있고, 뜰 좌우로는 안방과 부엌이, 전면으로는 사랑채와 창고가 나란하다. 서벽고택은 고택 전면 양옆으로 마루가 딸린 방과 작은 사랑방이 날개처럼 들어서 있는 것이 독특하다. 마루가 딸린 방은 감실을 따로 마련해 두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이 공간에 사용된 기둥만 원형기둥인 원주로 되어 있고, 사랑채나 안채의 기둥은 원형이 아닌 사모기둥으로 되어 있는 것도 큰 특징이다.

조선시대 때는 살림집에 원형기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원형기둥을 사용하는 예가 많았다. 하지만, 가옥 하나를 두고 다른 기둥을 사용한 예는 드물다. 고택은 전체적으로 목재를 찍어서 깎고 다듬는 자귀를 이용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기둥은 물론이고, 판문과 판벽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참고<서벽고택 신효승 선생>

 

여행수첩

주소 :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 378

전화 : 011-748-1387

서벽고택은 작은사랑방과 안방, 고방 등 3개의 방을 이용할 수 있다. 작은 사랑방은 5만원, 안방과 고방은 각각 7만원이다. 서벽고택은 수세식 화장실과 샤워장 시설을 아직 갖추지 못했지만, 앞으로 시설을 갖출 예정이며, 서벽고택뿐 아니라 평산 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사남고택을 연계해 한옥체험장으로 거듭날 계획이다.

 

찾아가는길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에서 안동, 영덕 방면 34번 국도를 이용해 청송군 진보면 소재지가 있는 진안삼거리에서 우회전해 31번 국도를 타고, 파천면 소재지를 지나 중평리 방향으로 우회전해 중평교를 건너 약 1.4km 정도 가면 서벽고택을 만난다.

 

여행코스

달기약수탕

물이 좋기로 잘 알려진 청송에는 달기약수가 유명하다. 조선 철종 때 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발견한 것이 그 시초다. 달기 약수는 상탕, 중탕, 하탕, 신탕 등 10여 곳의 약수가 전하며, 약수 주변으로는 약수를 이용한 닭백숙집이 즐비하다.

윤규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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