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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 물을 바라보다 - 안동 영호루

모두가 인정하듯 안동은 조선 500여 년 동안 유교의 성지이자 학자들의 본향이었다. 고려 말 어지러운 정국을 극복하지 못하고 조선을 건국할 무렵, 고려의 집권세력을 물리치고 신진 사대부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영남학파를 비롯한 성리학의 거점이었던 안동은 자연히 학문의 고장임과 동시에 정치과 문화의 요충지가 되었던 셈이다. 

이렇듯 권문세가가 즐비하고 당대의 수많은 학자들이 모였으니 안동에 서원과 이름난 정자가 세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택과 서원, 정자의 개수를 합한다면 단연 전국에서 최고다. 정자 역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자가 30여개로 아직까지도 선비의 묵향과 풍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정자로는 군자정, 귀래정, 옥연정을 등이 있는데 고풍스러운 외관 역시 아름답지만 무엇 하나 우열을 가리기 힘들만큼 선현들의 자취 또한 묵직하다. 

하지만 모든 정자가 옛날의 풍류 넘치는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정자와 누각이 문화재 보존차원에서 옛 모습을 복원하였지만 아직까지 시민들의 관심과 행정력의 부족으로 제 모습을 찾지 못한 것도 다수 있다고 한다. 그중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낙동강 누각을 대표했다는 영호루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낙동 제1루 영호루(映湖樓)

밀양의 영남루가 영남 제1루라면 영호루는 낙동 제1루라고 칭하고 싶다.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 여 년 동안 그 이름이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다.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서 왕이 이 곳 복주(福州)로 백관을 거느리고 피난하였 다고 한다. 왕은 피난중 자주 남문밖에 우뚝 서 있는 영호루를 찾았고, 때로는 누각 밑 강물에 배를 띄우고 모래사장에서 활쏘기 경기도 하였다고 한다. 난리가 평정되어 환궁한 왕은 복주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영호루를 잊지 못하여 친필로 한 ‘映湖樓’ 3자가 쓰인 금자현판(金子懸板)을 보내어 누각에 달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서에 기초하여 영호루는 공민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난의 영호루

영호루의 역사적 존재감에 반해 그 운명은 너무도 순탄치 않았다. 조선중기 명종(明宗) 2년(1547년)의 대수(大水)로 누각은 유실(流失)되었으나 현판만은 김해(金海)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어 6년 후인 1552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 안한준(安漢俊)이 중창(重創)하였으며, 영조(英祖) 51년(1775년)에 다시 홍수로 유실되어 부사 신맹빈(申孟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처럼 홍수로 인하여 2차례 중건된 영호루는 정조(正租) 15년(1792년)의 홍수 때 또 유실되어 4년 뒤에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중건하여 100여 년 동안 안동의 관문으로서 그 위용을 갖추었으나 갑술년(甲戌年) 대수(大水)는 면할 수가 없었다. 영호루의 수난은 1934년에도 이어진다. 또다시 들이닥친 대홍수로 누각은 유실되고「금자현판」만 수개월 후 선산군(善山郡) 구미리(龜尾里) 부근의 강 속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영호루의 재건

이처럼 파란을 겪은 영호루가 사라지고 강가에 빈터만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이에 전통과 옛 문화를 숭상하고 향토애(鄕土愛) 짙은 안동시민이 1969년 12월 「영호루 중건 추진 위원회」를 조직 하였고, 드디어 안동시가지 남편 강언덕인 정하동(亭下洞)에 1,085평의 대지를 확보, 1970년 11월에 역사적인 영호루의 중건을 보게 되었다. 노송(老松)과 잡목이 우거진 언덕에 북향으로 자리한 새 영호루에 올라보면 멀리 북서쪽으로 선비의 영봉 학가산(鶴駕山)이 우람하게 솟아있고 강 건너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인연(因緣)

客中愁思雨中多 

나그네 시름이 비 만나 더한데 

況値秋風意轉加 

더구나 가을바람에 더욱 심란하구나.

獨自上樓還盡日 

홀로 누에 올랐다 해 져야 돌아옴이여 

但能有酒便忘家 

다만 술잔 들어 집 그리움 잊는다. 

慇懃喚友將歸燕 

은근히 벗을 불러 돌아가는 제비는 

寂寞含情向晩花 

쓸쓸히 정을 품고 늦은 꽃을 향하구나.

一曲淸歌響林木 

한 곡조 맑은 노래 숲 속을 울리는데 

此心焉得似枯槎 

이 마음 어쩌다 마른 삭정이 같이 되었나.

 

영호루에서 이황(李滉)이 지은 시이다. 이처럼 영호루는 공민왕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영감(靈感)의 장소가 되며 그들과의 진하고 깊은 인연을 남겼던 곳이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 의(義)를 숭상하는 선비 유여회, 농암 이현보와 삼봉 정도전 등 우리의 머릿속에도 각인되어있는 수많은 선각자들이 저마다의 시와 글로 자취를 남긴 곳이다. 그중에서 1970년 중건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필사본 현판이 걸려있는데 북쪽에는 공민왕 친필 현판을, 남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현판이 걸려 있다. (친필 현판의 진본은 안동 민속박물관에 소장중이다.)

영호루의 서글픈 현실

오늘날 영호루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탁 트인 시야에 안동 시내 경관이 아주 좋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애써 찾아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오지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호루의 위치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바로 영호루에 대한 평가인데, 유구한 역사와 남다른 이야기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국가지정은 커녕 지방문화재로도 등록되지 못했다. 이유를 짐작하자면 여러 차례의 수혜로 인해 중건을 반복하였던 탓일 것이며 현존하는 영호루의 모습 또한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건설했기에 전통 건축학적으로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되었을 것이다. 

현재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영남루의 현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금이라도 영호루를 옛 전통 방식으로 재건하여 문화재적인 가치를 높이고 ‘낙동 제1루’의 위용을 부여하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 

신도청 시대를 맞이하여 웅도 경북의 문화를 알리기에 영호루 같은 문화재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이영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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