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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 물을 바라보다 - 봉화 -

‘風流’ 바람 풍(風), 흐를 류(流), 흐르고 자유로운 것이 바람뿐이랴. 유교와 선비로 점철되는 옛 문화 속, 물은 풍류와 직통한다. 

밤낮없이 학업에 정진하던 선비들은 간혹 산세가 좋고 물이 좋은 곳을 찾아 시와 음악을 향유했다. 그리고 풍류는 자연의 한 일원으로 자연과 벗 삼는 것이라 생각했다. 

옛 산수화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극히 작게 표현되듯 자연을 경외하며 그 속에 동화되어 싶어 했고 자연과 더불어 학문, 나아가 생의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중 물은 빼놓을 수 없는 풍류의 배경이었다. 그렇다면 물과 벗 삼은 선조들의 풍류는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을까.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자이다. 정자는 오로지 학문과 철학을 논하고 풍류를 즐기기 위한 선비들의 공간이다.

학문과 철학을 논하며 시와 음악으로 흥을 돋웠던 선비들은 때로는 산을 긁어 내려가는 세찬 물살을 보며, 때로는 주변의 생명들을 먹여 살리는 도도한 물결을 보며, 수많은 영감(靈感)을 떠올렸다. 

따라서 정자에서 바라본 물은 단순히 생명의 근원만이 아닌 우리문화의 정신적인 뿌리와도 연결된다. 

유교와 선비문화의 정점으로 주장할 수 있는 우리의 풍류문화. 그 풍류문화의 본체가 아직 정자로 강건히 남아있다.

풍류의 요람 봉화

전국적으로 정자는 760여개가 있고 그중 봉화에만 103개의 정자가 분포한다. 전국의 약 1/3에 해당하는 정자가 밀집해 있는 것이다. 

이마저도 현재 확인된 정자의 수. 사라진 것까지 합하면 170여개가 넘는다. 그런데 왜 봉화에 이토록 정자가 많은 것일까.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예로부터 안동과 영주를 중심으로 경상북도의 북부지방은 선비들의 본향이었다. 시대를 주도해온 영남학파라는 굵직한 문파가 있었고 거기에는 요즘 말하는 스타강사, 스타교수들이 즐비했다. 

이런 이유로 전국에서 학문을 닦기 위해 수많은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다. 이렇게 모여든 선비들은 학문의 경연장으로 풍류의 공간으로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정자의 건축요건으로 주변경치를 중요하게 따졌다. 결국 산세 좋은 봉화에 정자가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봉화의 정자를 설명하기위해 ‘청량산과 이황’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청량산은 영남학파의 거두 ‘이황의 산’이라 불릴 만큼 퇴계이황과의 인연이 깊은 산이다. 깊은 계곡과 기암절벽으로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청량산은 그 자체만으로 선비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일심(一心)을 다해 존경하는 ‘이황’ 이라는 대 선각자가 흠모했던 산이니 청량산을 바라보는 선비들의 시선도 분명 남달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정자의 건축시기를 보면 퇴계이황의 후학들에 의한 정자 설립이 상당부분이다. 이밖에도 낙향한 선비들이 많았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이러한 이유로 봉화는 오늘날 정자의 박물관이다. 학문과 더불어 풍류를 탐닉하는 선비시대에 빼어난 산수가 있고 대선각자의 자취가 남아 있으니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봉화의 정자는 수도 많지만 저마다 주는 느낌도 제각각 나름의 개성이 살아있다. 자연풍경과의 조화와 더불어 지은 사람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거북등에 올라탄 정자 ‘청암정’ (명승 제60호)

청암정은 충재고택 안에 있는 정자로 충재 권벌이 1526년(중종 20)에 정자 아래에 있는 3칸의 서재 충재와 함께 지은 정자이며 봉화정자의 대표격이다. 

청암정이라는 이름은 정자의 북쪽 곁에 있는 바위가 푸른빛이어서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충재 선생이 이현보, 이언적, 이황 등 영남의 학자들과 학문적 공감을 나누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몽화각

송파 박전과 그의 부인 신안 주 씨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웠다. 박전(1514∼1558)은 조선 명종 1년(1546)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 북평사를 역임하였고 명종 13년(1558)에 죽었다. 

그 뒤 부인 주 씨는 3년 상을 치른 후 어린 아들과 함께 친정인 울진으로 갔다. 그리고 순흥 땅 화천리로 이사하여 아들 박선장을 남삼송에게 가르침을 받게 해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이루니, 후세 사람들이 주 씨 부인의 행적을 추모하여 정자를 세웠다.

 

계서당

계서당(溪西堂)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동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집이다. 계서당은 계서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 1613년에 지었다고 하며, 문중 자제들의 훈학(訓學)과 후학 배양에 힘쓴 곳이라고 한다. 성이성은 본관이 창녕으로 아버지는 남원부사(南原 府使)를 지낸 증이조판서 성안의(成安義)이다. 자(字)는 여습(汝習)이고 호는 계서(溪西). 춘향전의 실제 주인공인 몽룡이 바로 성이성이다. 강직한 간관이자 청백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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