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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여성교육의 장,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지역 최초의 3.1운동 진원지로 우리민족의 의지가 서려있는 곳인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지역 최초의 근대여성교육이 시작된 곳으로 당시 보기 드문 서양식 건축물로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부산광역시의 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사(校舍)는 20세기 초의 서양식 건물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고, 1905년에 건축된 서양식 건물로써는 전국적으로 드물기 때문에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부산지역 근대여성교육의 시초이자, 부산지역 최초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곳으로 그 역사적 가치 또한 높다.

호주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다!

구한말 다른 지역보다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던 부산지역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부산에 여성교육기관이 출현하게 된 것은 5명의 호주선교사들 덕분이었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 복병산 기슭에 묻힌 호주의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6~1890)와 그를 찾아온 또 다른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다. 호주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는 1889년 10월 2일 부산에서 한국에 첫발을 내딛는다. 서울에 잠시 머문 그는 곧장 부산으로 돌아오는데 도중 무리한 도보여행 탓에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된 채로 부산에 도착한 직후인 1890년 4월 5일 사망하였다.

데이비스가 사망한 뒤 이듬해인 1891년 10월 12일 벨 멘지스, 메리 퍼셋, 진 페리, 제임스 맥카이와 그의 부인 사라 맥카이 등 5명의 호주선교사들이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부산, 마산, 진주 등 각지에서 근대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주로 고아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호주장교선교회는 1895년 10월 15일 좌천동에 있던 한 고아원에 3년 과정의 소학교를 설치하였고, 그 소학교가 바로 부산진일신여학교이다. 당시 이 고아원은 한칸에 불과한 초가였기 때문에 1905년 4월 15일에 현재의 위치에 학교를 새로 짓고 옮겨졌다.

서양 건축양식의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진일신여학교는 건축학적 가치가 뛰어난 국내 서양식건물이다. 특히 부산지역 근대건축물 대부분이 일제에 건축물인 것을 고려할 때 그 가치는 더욱 높다. 1909년 완공 당시 단층으로 지어지고 1931년에는 현재의 2층으로 증축되었다. 증축 당시 축대 위에 총 208.32m2 남향 2층 건물이 위치하고 있으며, 본래 건물 남동쪽 계단을 통해 진입해야만 했다. 1962년부터 1999년까지 장로회부산신학교가 건물을 교사로 사용했다.

호주선교회가 건립한 이 서양식 건물은 건축학적 가치와 함께 3.1운동진원지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산광역시로부터 인정받았다. 그 당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건물 노후화로 인해 기와파손, 누수 등으로 건물 보수 정비가 절실해 2006년 6월 교실, 창호, 지붕, 벽체 등 보수공사를 시행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부산지역 근대 여성교육의 시초

부산진일신여학교가 부산지역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산지역에서 활동하던 초기 호주선교사 대부분이 미혼 여성들이었던 까닭이다.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 사회였던 한국에서 여성의 몸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성 선교사들은 상대적으로 남성들보다 접촉이 쉽고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들에게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초기 여자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운영하였고, 차츰 근대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부산진일신여학교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설립한 이들 호주선교사들이 여성교육을 시작한 까닭은, 미래를 위해 어머니를 먼저 교육해야만 비로소 가정과 사회에서 미래의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산진일신여학교는 성경과 영어를 기본으로, 조선어, 역사, 지리, 수학, 심리학, 식물학 등을 가르쳤다.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 시행한 다양한 교육과정 덕분에 졸업생들은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1회 졸업생 양한나는 조선을 떠나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박순천(5회 졸업생)은 민주당 당수를 역임하는 등 사회 곳곳의 훌륭한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결국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 부산지역 최초의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일본인 교육이 일제 조선통치 합리화와 조선인 차별과 남성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민족교육과 소외된 여성계층의 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3.1운동의 방아쇠를 당긴 부산진일신여학교

1919년 3월 11일 저녁 무렵, 부산 최초의 독립만세시위가 부산진일신여학교 2명의 교사들과 11명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된다.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교사 주경애는 동료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 50여개를 만들었다. 다음 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준비한 태극기를 나눠주었고, 이에 호응한 수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좌천동 일대의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2시간 후 일본군경에 의해 모두 체포당한 이들은 부산진 주재소로 연행된 이후에도 모두가 만세시위의 주모자라고 주장했다. 부산감옥에 수감된 교사들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학생들은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는다. 하지만 부산진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부·경남지역 곳곳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난다.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전시관

호주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부산지역 신교육과 민족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부산노회와 부산광역시 동구청은 이러한 민족정신을 후대에 잇고자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전시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2003년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55호로 지정되었고, 부산광역시와 동구청의 예산 지원으로 약 2년간 자료 수집, 정리를 거쳐 2009년 11월에 부산진일신여학교 기념전시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기념역사관은 2개의 층에 4개관으로 나뉘어 각각 공간마다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역사와 가치를 각기 다른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이진명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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